정복여
내 기억은 스프링노트 속에 산다
무수한 기억은 번호도 없이 모여 있다
창을 열어둔 날이면 바람이 페이지를 넘긴다
한 줄에서 두 줄 사이에 숨었던 마른 기억은
습기를 만나면 모양이 살아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키가 커진 기억이다
기억은 기억들끼리 모여 밥도 먹는 모양이다
언제인지 서로 옷도 바꿔입은 모습이다
줄의 한쪽에 웅크린, 이 빠진 기억이 보인다
다리를 절룩이며 줄넘기를 하는 기억도 보인다
처음엔 그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서로를 불러달라는 외침들이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들끼리만 이야기한다
표정을 보면 얼마만큼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들은 나를 잊은 듯한다
나는 틈만 나면 스프링노트를 뜯는다
나를 버린 기억들을 흔적까지 없애버리려 한다
그러나 내 노트는 뜯으면 뜯을수록 많아지는
푸른 속지를 갖고 있다
기억의 스프링이 터질 듯 튕겨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