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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시계 사이로 내려가는 계단
이경림

나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아님 당신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나의 시계는 지금 세신데 왜 당신은 자꾸 열시라고 합니까. 당신은 말합니다. 늦었어, 그만 불 끄고 자지. 그러면 나는 대답하죠. 아이 당신두…… 한낮인데 자다니요? 그러면 또 당신은 심드렁하게 말하겠지요. 장난치지 말고 잠이나 자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말아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잖아요. 픽업해서 미술학원에 데려다줘야지요. 아니, 한밤중에 학교라니? 미술학원이라니? 그럼 정말 당신이 아직 세시에 있단 말이오? 나도 당신이 벌써 밤 열시에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벌써 열시에 도착했다면 그사이 일곱시간은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죠?

내가 일곱시간 동안 무얼 했냐구? 가만있자…… 세시에 사무실에서 연말결산을 끝내고 네시에는 p 상사 김 부장을 만나고 여섯시에 퇴근을 하고 잠수교를 건너고 혼자 저녁을…… 여, 여보 피곤해 죽겠다 제발 잠이나 자자. 무슨 소리예요? 난 네시에 여고 동창 모임이 있어요. 그리고 열시에는 다시 학원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야 하잖아요?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벌써 내일 세시에 도착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무려 열일곱 시간을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오? 하긴 뭘 해요? 맨날 다람쥐 쳇바퀴 돌기지.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당신은 회사에 가고 나는 청소를 했죠. 당신 집을 닦았죠. 당신 세탁기를 돌렸죠. 위이이잉 세탁기 속에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뜨개질을 했죠. 세탁기 속에서 처얼썩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죠. 파도에 아랫도리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소용돌이 속의 지구가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었죠. 그 곁에서 나는 한뜸 한뜸 뜨개질을 했죠. 지구의 덮개를 짰죠.

나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당신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당신은 또 말했죠. 출근 시간 늦었다, 여보 내 넥타이 어디 있지? 양말은? 와이셔츠는? 나는 또 대답했죠. 여보오 우리 그만 좀 해요, 밤 열시라 했잖아요. 제가 산 이 분홍빛 잠옷 좀 보세요. 침실에 은은히 흐르는 바흐가 들리지 않으세요? 무드 있는 밤이군요. 당신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출근 시간에 잠이라니? 아니, 그럼 당신 또 내일 아침 아홉시에 가 있단 말이에요? 그럼 어젯밤은 어디서 잤단 말인가요? 지난 열두시간 당신은 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요? 나? 현관문을 밀고 나갔지. 지하 차고에서 희뿌옇게 기다리는 차를 끌고 거리로 나갔지. 사장부장사장부장들이 끼어들고 앞지르고 밀어붙이는 길을 요리조리 빠져 회사로 갔지. 아, 여보 이럴 때가 아니야. 정말 늦겠네.

그런데 말입니다, 나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당신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당신은 또 말합니다. 오늘은 종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낯도 모르는 자들과 엄청난 액수의 사이버머니를 주고받는 날이란 말이오. 몇 놈을 잘 속이고 몇 놈을 때려잡느냐 목줄이 달린 날인데 젠장 아침부터 잠옷타령이라니. 아무튼 이 밤중에 당신이 가는 곳이 어디냐구요? 거참, 밤중이 아니라니까! 당신이야말로 매일 어디에 가 있는 거요? 뉴욕? 런던? 모르겠어요. 아무튼 여긴 밤이에요. 거리가 쥐 죽은 듯하고 이따금 앰뷸런스 소리가 귀청을 찢어요. 아아, 보세요. 저기 창문에 무언가 어른거리잖아요? 거참, 문단속 잘 하라니까! 여, 여보 무서워 죽겠어요. 저 좀 안아주세요. 거기가 어딘지 알아야 안아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글쎄요…… 여기가 어딜까요? 칠흑에 침대 하나가 둥둥 떠 있어요. 사방이 창이에요. 캄캄한 것들만 사방에서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발……

이크, 깜차까 어디쯤에서 나를 부르는군. 내가 오늘 때려잡을 자인지 몰라. 이따 얘기하자구.

여, 여보 제발 부, 불 좀 켜주세요.

그녀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선다. 순간 구들장이 소리 없이 열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펼쳐진다. 놀라 발을 헛디딘 그녀 캄캄한 계단을 솜뭉치처럼 굴러내린다. 방바닥이 소리 없이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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