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이들
함(唅)
구(句)
생(生)
그리고 읽는 그대들
때
언제나 현재
비밀과 죽음은 현재
곳
어둠의 아랫목과 그 건넛방
그곳에서 베짜기가 이어지거나 끊어진다
1
건넛방으로부터 베 짜는 소리 넘어오고
생은 무관히 어둠의 아랫목에 앉아 있다
그리고 가르치듯
생 기역
베 짜는 소리 멈춘다
생 기역, 배에 힘주고 입술을 양옆으로
팬티를 입을 때 고무줄 늘이듯
그리고 탁 하니 놓치는 소리
니은, 수줍은 노크
혀를 이에 대고……
생은 떠올라 몸을 일으킨다
생이 사랑을 하던 시절 가까이 다가가
지난 사랑을 본다
초록 대문 앞을 서성이던 젊은 생은 머무르고 머무르다
초록 대문의 손잡이를 니은으로 툭 치면
그 새벽 생의 사랑이 작은 발소리를 내어 나왔다
생 디귿, 사랑이 사뿐 발을 딛는 소리
히읗처럼 볼품없는 생에게
시옷처럼 예쁜 몸이 오고
그들은 이응으로 몸을 합쳐 밤을 헤맸지
읽는 그대들은 모를 밤을 헤매고
생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무언가를 들킨 기분으로
긴 사이
끊어졌던 베 짜는 소리 다시 시작한다
끊어졌던 씨실을 이은 손이 있었으므로
2
알그당 달그당 베 짜는 소리는 넘어오고
어둠에 아무도 없다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읽는 그대들의 눈이 어둠에 익을 때
보이는 것이 생긴다
생은 여전히 아랫목에 앉아
이제는 실뽑기를 하며
생 기역은 뭐라고 그랬지?
대답하기 위하여 생의 딸, 구가 나타나네
구, 생과 박자를 맞춰 뽑은 실을 물레에 감는다
구 혓바닥의 힘
생 니은은?
구 누에의 머리
여인의 끝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그 위로
검은 발자국
검은 발자국
디귿, 지난 사랑의 흔적
생은 묻고
구는 답하네 답하며
주고받네 시간을 노동요처럼 동시에
주고받지 못하네 긴 비밀을 물레에 감추며
긴 사이
생이 불현듯 깨달아 말한다
생 그런데 내가 원한 건 네 목소리만이 아니었구나
또다른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구가 물레를 돌리던 손을 멈춘다
동시에 베 짜는 소리도 멈추고
누설하듯, 건넛방의 불이 켜진다
3
어둠의 건넛방
생의 가장 어린 자식, 함이다
함이 혼자다
함, 물레 앞에 앉아
물레에 감긴 비밀을 풀었다 감았다 한다
비밀이 풀렸다 감겼다 한다
비밀이 풀렸다 감겼다 하며
비밀 브브흐 으으으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살아 있는 이의 목소리로 지지직거린다
함 (비밀을 따라 하듯) 므므느 으느느
함이 물레를 한 방향 한 박자로 천천히 돌린다
물레에 감겨 있던 비밀이 리듬감 있게 풀린다
함, 잠시 비밀이 내는 소리를 감상한다
듣기에 좋다
어둠의 다른 방
구가 열심히 물레에 실을 감으며 비밀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함이 풀어놓는 비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느새 비밀이 배경음악처럼 흐르지
그것도 모른 채……
구 (손을 쉬지 않으며) 함이
함이라 부르며 말할까
나의 가장 어린 동생에 대하여
어느 날 도둑이 빈집을 뒤져
가장 약한 것을 찾을 때,
조용히 손을 들고 나오는
함 (다른 방에서 설핏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다
이내 다시 비밀 감상에 빠진다)
구 함
함이에 대하여 말할까
우리의 부주의한 비밀에 대하여
필통을 뒤져 가장 뾰족한 연필을 고르는 작은 손
저 손이 무얼 쓸까 궁금해 다가가면,
종이의 끝에서
끝까지
굉굉
그려놓은 나선형의 원형들 그러나
모든 진짜는 그 원을 거둘 때 보인다
구, 거의 모든 실을 물레에 감아
물레가 아주 커다란 원을 이뤘다
동시에 저 방의 함, 거의 모든 비밀을 실처럼 풀어
물레에 남은 게 얼마 없다
둘은 계속한다 놀이처럼
각자의 건넛방에서
사이
멀리서 생이 베틀을 챙기는 모습이 보인다
함과 구, 그 모습을 보고는
쉿! 놀이를 멈춘다
사이
별안간 뒤통수에 검은 새를 키우는 어린 동생,
웃음을 터뜨린다
함 프흐흐
으흐흐
그 웃음이 생의 지난 사랑과 닮았어라
4
생이 어둠의 아랫목을 서성이며
그간 뽑은 생의 실을 두루 살핀다
살피며 정리한다
생 (실뭉치를 빗으며)
이것은 내 생애의 환희
(빗으며)
내 생애의 기회
(빗으며)
기필코 놓쳐버린 시간
백금 같던 시간
사이
마침내 실 정리를 끝내고
베틀에 앉는다
생 하늘에 베틀 놓고
구름에다 잉아 걸어
시간을 날실인 듯
사랑을 씨실인 듯
알그당
달그당*
생은 떠올린다
생에게 부모 형제가 있던 시간과
한번은 가져본 가지런했던 사랑 그리고
자식들…… 그들이 준 기쁨과 의문 그리고
낙담……
사이
생은 베짜기노래를 하며
떠오른 그 모든 시간 베짜기를 시작한다
생 하늘에다 놓고
구름에다 걸어
시간을 날실인 듯
침묵을 씨실인 듯 침범을 씨실인 듯
상처를 씨실인 듯 피난을 씨실인 듯
분노를 씨실인 듯 인내를 씨실인 듯
삼포밭을 가르듯 돌탑을 세우듯
알그당
달그당
묵상을 씨실인 듯 심심한 씨실인 듯
무른 듯 씨실인 듯 물러난 씨실인 듯
숨긴 듯 씨실인 듯 둔 듯 씨실인 듯
네시인 듯 세시인 듯
알그당
달그당
두려운 씨실인 듯 부끄러운 씨실인 듯
넘어진 씨실인 듯 엎드린 씨실인 듯
다문 씨실인 듯 머무는 씨실인 듯
용기롭고 자유하게
알그당
달그당
사는 듯 죽인 듯
사는 듯 죽은 듯
아는 듯 비밀을
아닌 듯
알그당 달그당 알그당 달그당……
어느새 읽는 그대들도
그대들의 시간을
베짜기노래에
섞어내고
그리하여 손바닥에 빗금을 그으며 짜낸 것은,
한폭의 사는 것 위의 어지러움
사이
구 (멀리서 목소리로) 두려운가?
생 무엇이?
함 (마찬가지로 목소리로) 두 두 두려웠어?
생 무엇을?
사이
마침내 생이 두려움을 옆에 두고
어지러움의 한 부분을 짚어낸다
순식간에, 어떤 손이 잘라내 가져간다
5
조수 간만을 가로지르듯 뻘 한가운데 서 있었네
그러다 문득 물때가 기울어 물이 들어온다
나와 함께 간 아주매들은 나오라고 소리치는데
물 들어오는 게 아름답지 뭔가
두 다리는 폭닥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인들도 나를 불렀지
우리가 군사 지역 조개를 캐고 있었거든
그제야 나는 정신이 들어
바닷물보다 빨리
군인보다 빨리
나가려는데
프흐흐
으흐흐
웃음이 터져서
싸게 생겨서
프흐흐
으흐흐
6
드문드문 베 짜는 소리 넘어오고
어쩐지 책장 넘기는 소리 같고
함, 얌전히 앉아 짓는다
생의 시간으로 짠 생의 옷을
구, 얌전히 닦는다
생의 시간이 빠져나간 생의 몸을
구 (닦으며) 기역
함 (배운 대로 더듬더듬)
기 기역
놓치는 소 소리
멀리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빼꼼 가지고 놀던 걸 떨어뜨린 어린 생이 보인다
구 니은은
함 나 나비의 머리
여 여인의 뒷모습
어린 생은 여기저기 나다니며 놀고
어느새 조금 더 큰 생이 나타나
어린 생과 놀아주기도
어린 생을 단속하기도
사이
구 디귿은?
함 (잠시 몸을 일으켜 사뿐 발을 딛고 앉는다)
엄마지
어린 생이 함을 따라 한다
사이
생의 시간이 다 모였는가…… 싶을 때
멀리서 젊은 생이 나타난다
젊은 생, 이리저리 다닌다
함과 구, 이리저리 바람을 느낀다
그 소리
함 바 바람은 비읍
구 쉿!
함 쉬쉿!
베 짜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
바람 소리 소리 소리
구 (거의 다 닦았다) 두려운가?
모든 생 더는
함 (거의 다 지었다) 두 두 두려웠어?
모든 생 한번도
긴 사이
생들이 하나둘 어둠을 빠져나가고
젊은 생만이 한참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네
미련이 남았는가…… 싶을 때
만난다 멀리 마중 나와 있던 생의 지난 사랑을
7
장례가 다 끝나고 모두 자리를 떠났을 때
어떤 손이 남은 베를 둘둘 말아
포대기처럼 안고 간다
읽는 그대들 눈에는 보여라
* 베짜기노래 변형.
